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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척부지도 (三陟府地圖)   1871년(고종8) 열읍지도(列邑地圖)를 그려 올리라는 명령이 전국에 하달됨에 따라 1872년 강원도(江原道) 삼척부(三陟府)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채색지도(彩色地圖)  삼척부는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동해시와 더불어 삼척시 미로면, 하장면, 신기면, 노곡면, 근덕면, 원덕면, 가곡면, 도계읍 그리고 태백시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삼척시 성내동 일원에 있었다. 본래 실질국(悉直國)으로 신라 파사왕    (婆娑

삼척 도계 콤팩트 시티

도계읍의 이해

#1 도계읍의 지역배경

-『척주지』에 소달리는 노곡 서남쪽에 있는 산골짜기 지역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척군지인 『진주지』에는“ 1630년(인조 8)에 삼척부사 이준(李埈)[1560~1635]이 소달동의 작은 마을 이름을 따서 소달리면이라고 하였는데 삼척부사 허목(許穆)[1595~1682]이 소달면으로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여지도서』에는 소달면, 『호구총수』에는 소달리면으로 각각 나온다.

- 1910년 소달면 도계리가 소달면 도계동이 되고, 1963년 1월 1일 소달면이 도계읍으로 승격하였다. 면소재지인 도계동의 이름을 따랐다. 1986년 삼척읍이 6개 리를 합하여 삼척시로 승격될 때 도계읍은 삼척군에 속하였다가 1995년 도·농 통합으로 삼척시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한국의 최고봉을 이루는 태백산, 육백산, 매봉산이 1000m 이상의 고봉으로 남고북저의 지형을 이루면서 오십천이 곡류하고 북쪽으로 흘러 동해로 유입되는 산간 상류 계곡 지역이다. 산간 기후 전형이 나타나며, 일교차가 심하고, 겨울에는 적설량이 많다. 이따금 고위평탄면이 전개되지만 대부분 좁은 계곡과 소규모 하천 충적지가 나타난다. 태백 산간 내륙 지역이기 때문에 경작지가 극히 적고, 전작 위주의 농경이 이루어지고 있다. 콩·옥수수·보리를 많이 재배하고, 최근에는 한우 사육이 성하다. 산림이 잘 보존되어 있어 임산물이 풍부하다. 1970년대까지 무연탄 최대 생산지였지만 석탄합리화 정책에 의하여 대부분 폐광됨으로써 대다수 주민들이 타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2 도계탄광의 역사

- 1936년부터 삼척 탄광이 본격 개발시작. 1937년 상덕리의 도계1갱을 시작으로 흥전갱과 점리갱이 개발되고, 곧바로 생산에 들어갔다. 개발에 속도가 붙으면서 도계갱, 흥전갱, 점리갱 등 흥전과 소달구역에 개설된 갱도는 23개에 달했다. 6·25 전쟁 기간에도 석탄 생산 활동은 계속되었다. 1916년 1,398가구 7,527명이던 도계읍 인구는 1952년 2,915가구 1만 6,199명으로 늘어났다.

- 삼척탄광이 남한지역 최대규모 탄전이 되면서 전국에서 노다지의 꿈을 안고 도계로 몰려왔다. 실제로 도계국민학교(현 도계초)는 1940년 개교 당시 73명이었지만, 1955년 1,527명으로 늘어나더니 1965년에서부터 1970년까지 3,000명대를 유지, 강원도 내에서 가장 큰 학교가 되기도 했다.

- 삼척시 인구는 1989년을 기준으로 13만여명에 이르렀지만, 지난해 6만3천여명으로 50%가량 감소했다. 결국 1989년을 기점으로 160개가 넘었던 강원도 내 탄광은 모두 문을 닫고, 올해 6월 말 대한석탄공사의 태백 장성광업소에 이어 내년 도계광업소가 문을 닫게 돼 민영 광업소 한 곳만 남게 됐다.

1995년 폐광지역 개발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통해 회생의 불씨를 살려보려고 했지만, 지역경제 붕괴는 막을 수 없었다. 현재 도계 인구는 1만명선마저 붕괴되어 존폐의 위기에 있다. 사택단지의 흔적이 여전희 남아있으며, 2009년 폐광지역개발지원금으로 인한 강원대학교 도계캠퍼스가 개교하였다.

삼척 도계 콤팩트 시티

도계읍의 이해

#1 도계읍의 지역배경

-『척주지』에 소달리는 노곡 서남쪽에 있는 산골짜기 지역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척군지인 『진주지』에는“ 1630년(인조 8)에 삼척부사 이준(李埈)[1560~1635]이 소달동의 작은 마을 이름을 따서 소달리면이라고 하였는데 삼척부사 허목(許穆)[1595~1682]이 소달면으로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여지도서』에는 소달면, 『호구총수』에는 소달리면으로 각각 나온다.

- 1910년 소달면 도계리가 소달면 도계동이 되고, 1963년 1월 1일 소달면이 도계읍으로 승격하였다. 면소재지인 도계동의 이름을 따랐다. 1986년 삼척읍이 6개 리를 합하여 삼척시로 승격될 때 도계읍은 삼척군에 속하였다가 1995년 도·농 통합으로 삼척시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한국의 최고봉을 이루는 태백산, 육백산, 매봉산이 1000m 이상의 고봉으로 남고북저의 지형을 이루면서 오십천이 곡류하고 북쪽으로 흘러 동해로 유입되는 산간 상류 계곡 지역이다. 산간 기후 전형이 나타나며, 일교차가 심하고, 겨울에는 적설량이 많다. 이따금 고위평탄면이 전개되지만 대부분 좁은 계곡과 소규모 하천 충적지가 나타난다. 태백 산간 내륙 지역이기 때문에 경작지가 극히 적고, 전작 위주의 농경이 이루어지고 있다. 콩·옥수수·보리를 많이 재배하고, 최근에는 한우 사육이 성하다. 산림이 잘 보존되어 있어 임산물이 풍부하다. 1970년대까지 무연탄 최대 생산지였지만 석탄합리화 정책에 의하여 대부분 폐광됨으로써 대다수 주민들이 타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2 도계탄광의 역사

- 1936년부터 삼척 탄광이 본격 개발시작. 1937년 상덕리의 도계1갱을 시작으로 흥전갱과 점리갱이 개발되고, 곧바로 생산에 들어갔다. 개발에 속도가 붙으면서 도계갱, 흥전갱, 점리갱 등 흥전과 소달구역에 개설된 갱도는 23개에 달했다. 6·25 전쟁 기간에도 석탄 생산 활동은 계속되었다. 1916년 1,398가구 7,527명이던 도계읍 인구는 1952년 2,915가구 1만 6,199명으로 늘어났다.

- 삼척탄광이 남한지역 최대규모 탄전이 되면서 전국에서 노다지의 꿈을 안고 도계로 몰려왔다. 실제로 도계국민학교(현 도계초)는 1940년 개교 당시 73명이었지만, 1955년 1,527명으로 늘어나더니 1965년에서부터 1970년까지 3,000명대를 유지, 강원도 내에서 가장 큰 학교가 되기도 했다.

- 삼척시 인구는 1989년을 기준으로 13만여명에 이르렀지만, 지난해 6만3천여명으로 50%가량 감소했다. 결국 1989년을 기점으로 160개가 넘었던 강원도 내 탄광은 모두 문을 닫고, 올해 6월 말 대한석탄공사의 태백 장성광업소에 이어 내년 도계광업소가 문을 닫게 돼 민영 광업소 한 곳만 남게 됐다.

1995년 폐광지역 개발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통해 회생의 불씨를 살려보려고 했지만, 지역경제 붕괴는 막을 수 없었다. 현재 도계 인구는 1만명선마저 붕괴되어 존폐의 위기에 있다. 사택단지의 흔적이 여전희 남아있으며, 2009년 폐광지역개발지원금으로 인한 강원대학교 도계캠퍼스가 개교하였다.

  삼척부지도 (三陟府地圖)   1871년(고종8) 열읍지도(列邑地圖)를 그려 올리라는 명령이 전국에 하달됨에 따라 1872년 강원도(江原道) 삼척부(三陟府)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채색지도(彩色地圖)  삼척부는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동해시와 더불어 삼척시 미로면, 하장면, 신기면, 노곡면, 근덕면, 원덕면, 가곡면, 도계읍 그리고 태백시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삼척시 성내동 일원에 있었다. 본래 실질국(悉直國)으로 신라 파사왕    (婆娑

삼척부지도 (三陟府地圖)

1871년(고종8) 열읍지도(列邑地圖)를 그려 올리라는 명령이 전국에 하달됨에 따라 1872년 강원도(江原道) 삼척부(三陟府)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채색지도(彩色地圖)

삼척부는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동해시와 더불어 삼척시 미로면, 하장면, 신기면, 노곡면, 근덕면, 원덕면, 가곡면, 도계읍 그리고 태백시 일대에 해당한다. 읍치는 삼척시 성내동 일원에 있었다. 본래 실질국(悉直國)으로 신라 파사왕 (婆娑王) 때 병합되었다. 지도는 삼척의 모습을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하였는데 특히 산지의 표현은 산줄기 중심의 전통적인 지형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동해로 흘러드는 오십천(五十川)은 물길의 근원까지 가려면 거의 50여번을 건너야 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지도에서도 오십천의 물줄기와 도로가 교차되면서 독특하게 표현되어 있다. 고을의 지세가 남북으로 길게 뻗쳐 있고 서쪽이 높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어서 서쪽을 지도의 상단으로 배치하였다. 면의 이름과 해안의 진명(津名)이 비교적 상세하나 동리(洞里)의 이름은 표시되지 않았다. 석성(石城)으로 둘러싸인 읍치에는 관동팔경의 하나인 죽서루(竹西樓)를 비롯한 문루(門樓)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읍치의 동쪽 해안에는 진영(鎭營)이 성곽과 함께 그려져 있는데 삼척포진(三陟浦鎭)에 해당한다. 1520년(중종15)에 축성되었으며 수금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해안가에 세워졌던 봉수대는 이 시기 대부분 허물어져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쪽 태백산 아래에는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黃池)가 그려져 있고 동쪽 해안에는 울릉도의 모습도 보이고 있다.

  골짜기 도시   대상지는 도계의 중심지로 서측의 대덕산과 동남 측의 오봉산 사이의 골짜기에 위치한다. 지형적 특성상 남북으로 이어진 도로변을 중심으로 가로로 긴 형태의 건물이 많다. 또한 동서로는 산 쪽으로 갈수록 지형이 올라가기 때문에 대부분의 대지가 석축으로 이루어진 기단 형태의 땅과 스킵되어 있는 형태의 건물을 많이 볼 수 있다. 태백시와는 다르게 골짜기 사이가 매우 좁아 (약 300m) 도시의 형성은 남북으로 확장되어 왔다.

골짜기 도시

대상지는 도계의 중심지로 서측의 대덕산과 동남 측의 오봉산 사이의 골짜기에 위치한다. 지형적 특성상 남북으로 이어진 도로변을 중심으로 가로로 긴 형태의 건물이 많다. 또한 동서로는 산 쪽으로 갈수록 지형이 올라가기 때문에 대부분의 대지가 석축으로 이루어진 기단 형태의 땅과 스킵되어 있는 형태의 건물을 많이 볼 수 있다. 태백시와는 다르게 골짜기 사이가 매우 좁아 (약 300m) 도시의 형성은 남북으로 확장되어 왔다.

  OLD(기존질서) & NEW(새로운 질서)   존치해야 하는 건물(4동)은 도계로, 영동선의 질서에 따라 가로로 긴 형태를 가지고 있다. 또한 오십천 쪽으로 레벨이 낮아지는 지형적 특성에 의해 존치하는 영역별로 다른 레벨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기존질서에 새로운 질서를 설정하여 영역별 다른 레벨을 극복하고 기존질서를 받아들여 오십천과 대덕산 그리고 새로 조성될 오픈 캠퍼스 2호관의 관계를 설정하려고 한다.

OLD(기존질서) & NEW(새로운 질서)

존치해야 하는 건물(4동)은 도계로, 영동선의 질서에 따라 가로로 긴 형태를 가지고 있다. 또한 오십천 쪽으로 레벨이 낮아지는 지형적 특성에 의해 존치하는 영역별로 다른 레벨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기존질서에 새로운 질서를 설정하여 영역별 다른 레벨을 극복하고 기존질서를 받아들여 오십천과 대덕산 그리고 새로 조성될 오픈 캠퍼스 2호관의 관계를 설정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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